나와 배인호는 그렇게 병원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로아가 약을 갈 때가 되자 다시 링거 실로 가서 간호사를 불렀다.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서야 드디어 링거를 다 맞게 되었고, 우리도 그제야 돌아가서 쉴 수 있게 되었다.배인호는 차로 나를 정아네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고, 나는 아이를 안은 채 차에서 내린 뒤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오늘 저녁 고마웠어요.”“일찍 쉬어.”배인호는 간단히 한마디만 건네고 차로 그 자리를 떠났다.그때는 이미 새벽 4시였다. 나는 로아를 제대로 눕힌 뒤 화장을 지우고 씻으러 들어갔다. 오늘 저녁은 확실히 너무 힘든 저녁이었던지라 나는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바로 잠에 들었다. 다행히 정아네 집 베이비시터가 아이를 잘 돌보는지라 점심까지도 아이의 일 때문에 나는 잠에서 깬 적이 없었다.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쯤 배인호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그 문자는 아주 길었으며 그건 전부 아이의 장염에 대해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와 연관된 내용이었다. 그 문자를 보고 나는 잠에서 덜 깬 듯한 환각을 느껴 순간 멍해졌다.이때 전화벨 소리가 크게 울렸고, 이우범이라는 세글자가 나를 환각 속에서 끄집어냈다.“집에 잘 들어갔어요?”전화를 받자마자 이우범의 냉랭한 소리가 들려왔다.“네, 왜요?”나는 앉아서 주위를 한번 살폈고 목소리는 약간 쉰 것 같았다. 아마 어젯밤 술을 먹은 원인인 듯 하다.“별거 아니에요. 어제 잠시 가봐야 해서,지영 씨랑 정아 씨를 데려다주지 못했던 게 걱정이 되어서요.”이우범이 내 말에 답하더니 이어서 물었다.“지금 정아 씨네 집에 있어요?”나는 부인하지 않았다“네, 뭔 일 있어요?”“잠깐 나와봐요. 정아 씨네 집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이우범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었고 나는 다소 당황스러웠다.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거 아는 거지? 게다가 이미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기 까지 하다니.나는 재빨리 일어나 씻었다. 그 시각 정아와 몇몇 아이는 거실 매트에서 기어다니며 놀고 있
정아의 말을 들은 이우범의 눈에는 초조함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약간 비난 섞인 말투로 나를 향해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왜 제일 먼저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그때 민설아 씨와 같이 있었잖아요?”내가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이우범은 내 반박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듯 묵묵히 나를 쳐다보기만 하였다.이때 정아가 나 대신 입을 열었다.“그런 눈으로 지영이 보지 마요. 전에 난 이우범 씨가 깨끗한 사람인 줄 알고, 심지어 지영이 더러 그쪽 받아주라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쪽도 배인호와 별 다른 거 없네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요.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건데 말이죠?”그 말을 들은 이우범의 얼굴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 곳에는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없어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더욱 안 좋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제 저녁은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어요.”이우범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정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약간 망설이는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곧 원래대로 다시 돌아왔고, 계속하여 이어서 내게 물었다.“민설아가 여기 있는 거 알면서 인호한테는 안 알려준 거예요?”“왜 배인호 씨한테 알려줘야 하죠? 그건 그 둘 일이라 저는 별로 간섭하고 싶지 않네요.”나는 담담하게 답했다.“그래요, 알겠어요.”이우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하더니 고개를 돌려 큰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로아 안에 있어요? 저 로아 보고 싶어요.”정아는 곧장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그녀가 이우범을 제지하지 않게 했다.이우범의 두 아이에 대한 사랑은 거짓 하나 없이 진심이었고, 나 또한 앞으로도 그와 아이가 거리를 두게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한마디 했다.“여기서 기다려요. 내가 가서 로아 안고 올게요.”이우범은 발걸음을 멈추었다.이윽고 나는 로아를 안은 채 밖으로 나왔고, 오늘 로아는 전보다 많이 좋아진 듯 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알겠어요. 소식 있으면 바로 알려줄게요.”나는 대충 대답했다.딜런은 온종일 그와 민설아 사이의 비밀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나도 그에게 민설아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가 먼저 알아서 찾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정아는 내게 물었다.“그 사람도 의사를 찾고 있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하다가 민설아와 딜런 사이의 일을 정아에게 알려주었다. 전체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직감은 나와 같았다. 딜런과 민설아 사이에는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었고 절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나는 대답했다.“맞아, 그래서 제대로 알아보려고. 민설아가 계속 나를 놓아주지 않고 괴롭힌다면 나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맞아!”정아도 내 생각에 동의하며 말했다.“민설아 정말 주도면밀한 것 같아. 전에 서란 보다 더 독한 여자야. 우리도 미리 준비해야지.”밖은 또 어두워졌다. 서울에 돌아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서울에 돌아오니 나는 뭔가 소속감이 들었다. 환경이든 분위기든 매우 편안했다. 나는 속으로 몰래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 배인호와 이우범 두 사람과 결론을 내린 뒤 더 이상 엮이지 않으면 나는 역시 서울로 돌아와서 평생을 살고 싶었다.게다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도 모두 서울에 있었다.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도우미가 가서 문을 열었지만 모르는 사람인지 다시 정아에게 돌아와서 말했다.도우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한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 속도는 마치 한 마리의 개가 달리는 것만큼 빨랐다.하지만 그 정말 개가 아니라 노성민이었다.그는 면도도 하지 않아 거뭇거뭇한 수염에 빨갛게 된 눈이 사흘 밤낮을 잠도 못 잔 것 같았다. 온몸에서 원한을 품은 여자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노성민을 본 정아는 벌떡 일어나더니 생각도 하지 않고 바닥에 널려있던 장난감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누가 들어오래? 나가!”“박정아, 너 너무하는 거 아니야?”노성민은
겁쟁이 노성민은 배인호가 온 것을 보고 바로 지원군을 본 것처럼 배인호에게 달려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사람 때리지 말고. 내가 여자를 안 때린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지?”“무슨 일이에요? 밖에 문도 안 닫고?”배인호가 물었다.정아는 눈을 희번덕하게 뜨며 더 말하고 싶은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차갑게 노성민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친구한테 물어봐요. 제주도에서 여기까지 왜 쫓아 왔는지.”“너 무슨 짓 했어?”배인호는 고개를 돌려 노성민을 바라보며 물었다.노성민은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깔끔하게 배인호에게 말해주었다.“이우범 씨가 나와 정아가 그날 밤 술집에 간 사진을 노성민 씨한테 보내줬대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그런 옷을 입은 채 아이들까지 팽개쳤다면서 특별히 이렇게 멀리까지 왔더라고요.”내가 이렇게 요약하자 노성민의 표정이 살짝 당황스러워졌다.배인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물었다.“사실이야?”“인호 형, 내 말도 틀린 거 아니잖아. 형이 두 사람이 어떻게 입었는지 못 봐서 그래. 나도 예전에 술집을 매일 갔었는데 거기 남자들이 다 어떤 놈들인지 모를 것 같아? 집에 아이들이 몇 명인데 아무리 베이비시터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마음대로 나가서 놀아도 되는 거야?”노성민은 비록 당황하긴 했지만 매우 그럴듯하게 말했다.“내도 봤어.”배인호가 차가운 목소리로 노성민의 말을 끊었다.“어? 봤다고?”노성민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두 사람이 어떻게 입었는지 내가 봤다고. 그날 나도 거기 있었어.”배인호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쿠션을 주운 뒤 노성민의 품에 세게 던졌다.“너 요즘 계속 야근했다며. 며칠 밤을 새우며 일했다더니 이렇게 시간 내서 두 사람을 혼내러 올 시간은 있었어?”정아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역시 2, 3일 동안 야근을 했으니 노성민의 모습이 거의 쓰러질 것 같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나는 그렇게 매를 버는 말을 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온 노성민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배인호가 아이들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다음 순간 배인호의 말은 나를 다시 안도하게 했다.“우범이 집에서 너희 아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겠네. 우씨 가문에서는 예전부터 너희 두 사람 반대했으니까.”“네, 난 상관없어요. 그런 이유라도.”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배인호는 더 말하지 않고 나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속속들이 그에게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 정아가 로아를 안고 나오며 나를 불렀다.“지영아, 우리 공주님이 계속 우는데 어떻게 하지?”로아는 작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도록 울고 있었다. 작은 입술을 삐쭉이며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는 모습이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해서 우는 것 같았다.나는 얼른 달려가서 로아를 안았다. 하지만 요 녀석은 배인호가 온 것을 아는지 눈으로 배인호를 계속 바라보았다. 내 품에서 뒤척이며 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엄마 품이 제일 좋은 거 아닌가? 이제 6개월이 조금 넘은 녀석이 고작 앉는 것을 배울 나이에 벌써 억울한 척하는 법을 배웠다.배인호의 시선이 로아에게로 향하더니 바로 다가와서 손을 뻗어 내 품 안에서 로아를 데려갔다.정아는 눈을 크게 뜨며 그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신기한 장면이 또다시 발생했다. 로아는 배인호의 품에 안기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얌전해졌다.“이건... 어이가 없네.”정아는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지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나는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혈육이 자연스럽게 끌리는지도 모른다...배인호는 로아를 안고 나가 정원을 걸어 다녔다. 나는 방으로 가서 승현이를 안고 나왔다. 이때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오더니 마침 햇볕을 쬘 수 있었다.정원에 흰 의자에 배인호는 로아를 허벅지에 올려놓고 손으로 로아의 작은 팔을 바쳐주자 로아는 겨우 앉을 수 있었다.배인호의 부드러운 손길에 로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저 눈빛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보는 눈빛일 수 있을까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배인호의 어머니 김미애로부터 전화가 왔다.그녀는 매우 화가 난 말투로 말했다.“지영아, 민설아가 서울에 있었어. 우리 모두 민설아한테 속았어.”나는 마음이 철렁했다. ‘김미애가 어떻게 안 거지?’“아주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내가 물었다.“나 제주도로 돌아왔어. 안 그래도 좀 이상하다고 느꼈어. 평소에 빈이가 얼마나 사람을 따르는데. 내가 잠깐 외출하기만 해도 나한테 전화해서 언제 오냐고 하던 애가 이번에는 나한테 천천히 오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바로 제주도로 돌아왔더니 집에 빈이하고 빈이를 챙겨주는 도우미만 있어. 민설아는 보이지도 않아.”김미애는 점점 더 화를 냈다. 내가 말하지도 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빈이하고 도우미가 민설아를 위해서 출근했다고 거짓말까지 했어. 내가 직접 민설아의 병원에 가보니 병원장이 긴 휴가를 냈다고 하더라니까! 몰래 서울로 가서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절대로 좋은 일은 아닐 거야.”확실히 좋은 일은 아니었다. 민설아는 서울로 와서 이우범을 만났다. 배씨 집안을 공격하는 일에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도 확실한 증거가 없었고 아마 이우범도 나에게 증거를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묵묵히 김미애의 말을 듣고 있었다.그녀의 말이 끝나자 나는 다시 물었다.“아주머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거예요?”“어떻게 처리하긴? 바로 민설아한테 빈이만 남겨두고 배씨 집안에서 나가라고 할 거야. 아이를 자기 도구처럼 사용하는 여자야. 이러다간 아이를 완전히 망쳐버릴 거야.”김미애는 아주 확고하게 말했다.“만약 빈이가 민설아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하면요?”나는 또 물었다.김미애는 나의 물음에 한숨을 쉬었다.“어휴, 빈이가 민설아와 떨어지지 않아서 그동안 쫓아내지 못한 거야. 안 그러면 진작에 쫓아냈어.”이 문제는 나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김미애가 고민하도록 놔둘 수밖에 없었다.민설아가 서울에 있다는 걸 김미애가
마침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이제 삼촌의 일이 거의 다 마무리가 되었다. 부모님은 삼촌의 회사를 이어받게 되었고 이제부터 그쪽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엄마의 뜻은 나도 로아와 승현이를 데리고 거기서 함께 지내자는 것이었다.“제주도에도 돌아가지 마. 우범이가 그쪽으로 돌아가면 너도 불편할 거야.”엄마의 목소리가 무거웠다.“이제 나와 네 아빠는 더 바라는 거 없어. 그저 네가 아이들과 함께 편안하게 지내는 거야. 결혼이야...”엄마는 더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뜻을 이해했다. 배인호든 이우범이든 부모님은 더 이상 나와 엮이지 않길 바라셨다.“조금만 지나면 내가 거기로 갈게요.”나는 대답했다.지금 바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민설아와 딜런 사이의 비밀은 마치 블랙홀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뭔가 내가 부모님 옆으로 가서 민설아를 피한다고 하더라도 이다음에 꼭 다시 얽히게 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이다음에 다시 얽히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여기서 피하지 않고 해결해야만 이후에 내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뭘 더 기다리는 거야? 너도 서울에 계속 있었잖아. 배인호도 이우범도 거기 다 있는데 나와 네 아빠는 걱정돼.”엄마는 내 말을 반대했다. 지금 당장 내가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길 바라셨다.“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어요.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엄마가 도와줘야 할 문제가 있어요.”내가 말했다.“무슨 일인데?”엄마가 물었다.“로아하고 승현이를 먼저 엄마한테 보내려고요. 한동안 나 대신 보살펴 주세요. 이쪽 일 처리하고 나면 바로 돌아갈게요.”나는 로아와 승현이가 여기에 있으면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큰일이었다.배인호의 의심이 걱정되는 것도 있었지만 민설아가 더 걱정이었다. 너무 독한 여자였다. 만약 로아와 승현이 때문에 자기와 빈이가 배씨 집안에서의 자리가 흔들린다고 생각한다면 나쁜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부모님은 삼촌의 회사를 관리해야 하기
배인호는 우지훈과 이우범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그 두 사람을 상대하느라 이렇게 바쁜 거예요?”내가 물었다.“맞아. 그리고 회사에 다른 일들도 처리해야 해. 빈이를 민설아에게 맡길 수 없어서 널 찾아온 거야.”배인호의 민설아를 포기하려고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지킬 것이다.나라면 절대로 내 아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민설아는 무서운 사람이라 모든 신경을 배인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아이는 그저 도구 같은 존재였다.“문제는 내가 도와 줄 수 없다는 거예요. 배인호 씨.”나는 또 거절했다. 나는 지금 빈이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책임감 없는 엄마 때문에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가 마음 아프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빈이를 돌봐줄 수는 없었다. 그런 시간이 나에게 있다면 로아와 빈이를 옆에 두고 보살폈을 것이다.“네가 꼭 도와줘야 해.”배인호의 목소리는 아주 강압적이었다.“네가 건 조건 들어줄게. 만약 이우범과 우지훈이 나를 더 귀찮게 하지 않는다면 나도 더 따지지 않을 거야. 복수도 하지 않을 거고. 이 조건이면 만족해?”눈에 보이는 평온함은 거짓이었다. 배인호는 나를 속이는 것 같지 않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돌아와서 다시 얘기해요.”나는 지금 두 아이를 데려가야 했다. 배인호와 다른 사람이 아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어디로 가는데?”배인호가 나의 말속의 포인트를 짚으며 말했다.“얼마나 걸려?”내가 어디로 가든지 배인호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일까?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대답했다.“인호 씨하고 상관없는 일이에요. 아마 모레쯤 돌아올 거예요. 그때 가서 대답할게요. 하지만 인호 씨도 약속 지켜줘요. 우범 씨하고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나까지 힘들어질 것 같으니까. 평화로운 내 일상을 제발 방해하지 말아요.”만약 두 사람의 갈등이 나와 무관하다면 서로 죽일 듯이 싸우든지 말든지 나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나와 관련되어 있기에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